8월31일은 페퍼선니의 생일이었다.
그 전날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며칠 전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역국 해줄게."
때마침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에 막혀 잠깐의 고민을 해볼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일찍 일어난다해도 과연 미역국을 끓여줄 수 있을까?'
동네 어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 오뚜기 미역국을 집는다.
뒤켠에 놓인 햇반이 눈에 들어왔지만, 집에 하나 있던 것 같아 시선을 뗐다.
"혹시 집에 햇반 있어?" 라고 전화로 물어보면 눈치를 챌 것 같아 관두었다.
다음 날 아침.
모닝콜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울렸다.
"조금 더 자..."
숙취에 끙끙거리며 눈을 못 뜨는 나에게 페퍼선니가 나즈막히 다정스런 말을 건넨다.
먼저 일어나 관심을 가져 준 배려심이 사랑스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눈은 감겨있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졸린 눈으로 그녀의 상태를 살펴가며 가방을 뒤적인다.
"옳거니, 미역국을 제대로 사왔구나."
일 년에 한 잔 마실까 말까한 술을 8월에만 네 번이나 마셔댔다.
북어국이나 사골우거지국으로 잘못 골랐을까봐 새벽 내내 잠을 설쳤지만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주방에 들어가 냄비에 물을 따르고 미역블럭을 넣은 채 멍하니 서 있는데
물이 끓기도 전부터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네가 생각하던 미역국이야? 응?'
그렇게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간마늘과 미원을 찾았다.
전자렌지 위에는 햇반이 없었다.
미역국은 다 끓여놨는데, 밥이 없었다.
밥상을 조심스레 펼치며 새로 밥을 지어야 할지, 햇반을 나가서 사올지 고민한다.
"페퍼선니야, 일어나. 생일 축하합니다~ 이리 와봐"
늘 반말을 하는 사이가 분명한데, 왜 생일을 축하할 때는 존댓말을 쓰게 되는 것일까?
졸린 눈을 비비우며 침대에서 내려와 미역국을 발견한 그녀의 모습을 보아하니 살짝 감동하는 눈치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려 했지만 그녀의 감동을 깨뜨리기 싫었기 때문에
난 이마의 땀을 닦는 척 하며, 이렇게 말했다.
"후.. 밥까지 할 시간은 없겠더라고..."
아침에 있었던 미역국 사건때문에 자꾸 마음이 걸려 저녁엔 커다란 케이크를 사갔다.
초에 불을 붙이고 형광등을 껐다. 이런 분위기는 국민학교 이후 처음이라 무척이나 어색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어색해서 큰 용기를 내어 박수를 쳐가며 쭈뼛 쭈뼛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 역시 뻘줌한 모습으로 박수를 함께 치며 노래를 따라 불러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요즘 다투기도 엄청 다투는데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못살게 굴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오손도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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